즐겨보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이 대단원에 막을 내렸다. 깔끔하게 총 16부작. 비록 시청률은 한자리 수준이었다지만 개인적으로는 ‘연애시대’이후 최고의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 하다. 해서, 감히 이 드라마에, 드라마 평론가/대중 문화 평론가도 아닌 한 시청자인 필자가 ‘시대를 앞서간 드라마’라고 수식어를 붙여 본다.
입체적 인물
시대를 앞서갔다는 표현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입체적 인물 때문이다.
보통 드라마를 보면 초반에 주인공의 캐릭터가 셋팅이 된다. 착한 주인공, 나쁜 악역. 드라마 안에서는 이들을 둘러싼 극도의 갈등이 생성된다. 최종회에서는 이 갈등이 해소되고 악역이 벌을 받고 주인공이 보상을 받으면서 마무리가 된다. 흔히 말하는 권선징악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이 바뀌었다. 절대주의는 사라지고 상대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과거에는 ‘착한 것’이 곧 ‘좋은 것’이고 ‘가치있는 것’이었지만 요즘 시대는 그렇지 않다. 기준에 따라서,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다른 판단이 가능한 시대다.
그런면에서 이전의 평면적 인물보다 입체적 인물이 사람들에게 더 호소력있고 관심을 받게 될터다. 단지, 아직 좀 덜 익숙할 뿐.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면, 초반에 ‘우리편’을 찾느라 제법 고생을 하게된다. 보통 드라마를 보면 ‘나’를 ‘주인공’에 투영시켜서 대리만족을 느끼는데, 이 드라마는 ‘나’를 대신할만한 착한 놈이 없다. 시작부터 현란한 말솜씨로 시청자를 앞도한다. ‘도대체,, 이건 뭐야’ 라는 생각이 절로든다.
1회가 끝나도, 사실 도대체 ‘누구’를 나의 ‘대리인’으로 내세워야 할지 감을 잡을 수 가 없었다. 물론 주인공이 현빈과 송혜교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캐릭터를 보면 쉽게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우리에게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입체적인 모습이 보여지기 시작한다.
윤영(배종옥 역)이 드라마 초반에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남자를 이용하고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 같은 여자로 나오지만 중반에는 뭔가 감춰진 삶이 있는 의리있고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종반부에는 망가질데로 망가진, 사실 알고보면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사람으로 비춰진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주준영(송혜교 역)의 어머니는 어떤가? 도박에 중독되고 딸의 삶에는 쥐꼬리 만큼의 관심도 없는, 자기 원하는데로만 살려고 하는 부잣집 사모님이었던 사람이 드라마 후반으로 가면서 알고보면 가진것은 많아 보여도 항상 외로움에 쩔어 살았고 그저 딸 걱정에 마음 한켠은 여리고도 착한 사람이었다는 모습이 포착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제한된 정보로 한 사람의 단면만 보는 바람에 선입견으로 그 사람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사실 그 사람들도 잘 알고보면 전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 ‘그들이 사는 세상’이 이런 입체적인 캐릭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분명 이런 입체적 캐릭터가 드라마의 흐름을 주도하리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드라마
드라마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갈등이다. 출생의 비밀은 물론 엮일데로 엮인 불륜도 그렇고 삼각관계 등 드라마는 사람들의 긴장을 유도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갈등을 다 쏟아낸다. 사실 현실에서도 그렇게까지 꼬이기는 어려운데도, ‘드라마니깐’, 그래도 있을법한 이야기라서 받아들이고 빠져든다.
하지만, 이 그들이 사는 세상은 너무 현실적이라 일부러 갈등을 고조시키지 않아도 드라마 스토리가 진행되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현실적인 갈등이 그 자리를 매웠다고 할까?
가장 큰 압권은 두 주인공 정지오(현빈 역)와 주준영(송혜교 역)이 헤어지는 장면이다. 정말, 깜짝 놀랐다. 개인적으로는 정지오가 자신이 아픈 것 때문에 주준영이 고생할까봐 걱정 안시킬라고, 마음 안쓰게 해줄라고 일부러 억지로 헤어진게 아닌가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회쯤에 자신이 헤어지자고 했던건 사실 싫어서가 아니라 내 눈이 안보여서 고생안시킬까봐 그랬다고 이야기를 하고 갈등이 해소 될줄 알았다.
하.지.만. 그 예측은 어이없이 빗나갔다. 아니 사실 작가나 감독이 시청자를 살짝 우롱했다(?)고 표현하고 싶다. 분명 병원에서 주준영(송혜교 역)의 옛날 애인이 정지오(현빈 역)가 병원을 다녀가는 뒷모습을 보는 장면을 일부러 집어넣은 만큼 그가 주준영에게 꼰질러 주는 복선이 아닌가 기대를 했는데..
그 둘은, 그랬다. 아무 까닭없이, 딱히 큰 이유없이 헤어졌다. ㅡㅡa
“그런게 진짜 길들여지지 않는건 바로 이런거다. 뻔히 준영에 마음을 알면서.. 하나도 모르는척 이렇게 끝까지 준영의 속을 뒤집는 뒤틀린 나 자신을 보는것. 사랑을 하면서 알게되는 내 이 뒤틀린 모습들은 정말이지 길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만하자고.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 만나자고. 처음엔 알았는데 이젠 나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안고싶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왜 나는 자꾸 이상한 말만 하는건지..“
연애를 해봤나? 연애를 하게되면 정말 사소한 문제가 발단이 되어서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거친 이야기가 오가다가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고 결국 울고불고 그런다. 이건 당사자들에게는 정말 엄청난 갈등이지만 사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내막을 모르니 별반 갈등도 아니고 ‘어이없는 걸로 싸우네’ 정도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딱히 서로간에 이유도 모른채, 그냥 헤어지자 그래서 헤어지고.. 무슨 극적인 반전이 있은 것도 아닌데 갑작스레 둘이 다시 사귀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드라마적 갈등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갈등인데 이걸 드라마 안에서 담아낸 것이다. 자칫 너무 느슨한 흐름이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전체 스토리를 잘 짜는 바람에 전혀 빈틈을 느낄 수 없었다.
또한 이런 갈등으로 드라마를 이어왔기에, 그래서 이 드라마는 마지막회가 허전하지 않았다. 다른 드라마들은 최종회 직전에 너무 갈등을 극도의 지점까지 끌어갔기에 도통 마지막회를 보고 있자니 김새는게 항상 마음이 좋지 않았다. 왠만해서는 마지막회에 허무함을 안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롤러코스터를 너무 높은 지점까지 끌어올렸다면 그 낙폭도 감안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마지막회를 보는내내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고 드라마가 끝나고 등장하는 스탭들의 사진들까지 묘하게 마음에 다가왔었다. 갈등은 있었지만 극적으로 해소시킬만한 갈등이 아닌 현실에서 충분히 느껴보았고 알던 그 갈등이 그저 다큐멘터리 흘러가듯 스르륵 해소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 드라마는 시대를 앞서갔다고 본다.
마치 유재하씨 처럼, 지금 들어도 전혀 예전 노래같지 않은 노래를 불렀든 사람처럼 이 드라마는 그렇다. 훗날 다시 이 드라마를 보더라도 예전에 찍었다고 느낄 수 있는건 헤어스타일과 옷 정도가 전부일테지..
즐거웠던 가상 체험
일본 드라마를 즐겨보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드라마를 통해 또 다른 직업 하나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 또한 방송국 드라마 PD들의 삶을 나름 잘 담아낸 드라마였기에 참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회사 근처에 커피를 마시러 갔었는데, 커피 주문이 테이크아웃밖에 안된다는게 아닌가? 이유인 즉슨 10여분 뒤에 그 커피숍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어서 장소를 비워줘야 한단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봤듯이 스태프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쉬고 있기도 하고 나름 현장에서 카메라 위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외부에서는 장비 챙기고, 스케쥴 챙기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대사가 귀에 날라와서 꽃히고,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모습들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을 배운적은 이번이 처음이지 않나 싶은데.. 16부작 촬영하느라 고생한 스태프들과 좋은 연기로 좋은 드라마를 보여준 연기자들 그리고 작가님과 감독님께 참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_^
Pingback: blogring.org
아 전 한국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 포털싸이트에서 현빈씨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길래 호기심을 가지고 ‘이전 작품 어떤게 있었지?’ 하는 호기심으로 찾아봤는데
아 정말…그들이 사는 세상..정말 맘에 드는 드라마더군요.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 방영될 당시 반응이 어땠을까 하는 맘으로 구글링하다가 쓰신 블로그 글을 읽게되었네요…
완전 공감하고 끄덕끄덕….하고 읽고 갑니다….
연애시대도 시간이 되면 한 번 봐야 겠습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_^ 연애시대는 꼭 한번 보세요. 연기며 스토리뿐만 아니라 능력자 부부께서 만드셨던 탓에 영상과 음악도 절묘하게 어우러진답니다. 이번 시크릿가든 마지막회에 손예진씨 나오면서, 다시 찾아보고 싶어지는 작품이기도 하죠.